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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자비만이 자유이다.

수정 삭제 조회 수 9742 추천 수 0 2001.12.26 23:22:09
제목 : 오직 자비만이 자유이다.

나는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때나 세상 인연 때문에 시끄러워질 때에는 만사 제쳐버리고 훌쩍 바깥으로 여행을 떠난다. 세상 밖으로 나가보면 실은 작은 일에 마음이 너무 집착해 있었음을 느낀다. 그러면 마음이 비워지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아니 문제가 원래 없었던 것인데 내 마음이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며칠 전에도 나는 마음을 정리할 요량으로 동남아의 한 나라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서... 당시 나는 다리에 화상을 입고 있었던 터라 여행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무작정 길을 떠났다. 그런데 몸의 화상을 스스로 치료하느라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었는지, 마음이 비는게 아니라 더욱 무거워지고 몸마저 피곤해졌다. 잘못하면 상처가 덧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무척 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처럼 활개를 치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을뿐더러 현지인들과 잘 섞일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호텔 가는 택시를 탔다가 두 세배 바가지를 쓰는가 하면, 길도 모르는 운전기사가 엉뚱한 곳에 내려주는 바람에 돈은 물론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경비를 쓰게 되었다. 점점 여행이 짜증나면서 슬그머니 현지 운전사들에 대한 의심과 거부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점점 가격을 깎는데 집중하게 되다보니 전혀 여행을 즐길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최심장부에서 돌발한 불행의 충격이 겹치기로 덥쳐왔다. 여행 도중 신문이나 TV에서 내내 이 충격적인 사건을 보도해대었다. 나는 더욱 우울해졌다. 나는 왜 이슬람권에서 그런 사건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또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루는 ‘심즈’라고 하는 오후 여행 코스를 밟아보았다. 버스로 두시간 정도 달려 해변에서 카누를 타고 아름다운 다도해를 방문하는 코스였다. 그러다가 소수의 무슬림들만이 거주하는 섬을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대부분이 불교도인 국가에서 이슬람교도만 사는 섬이라고 해서 왠지 흥미가 동했다. 그런데 막상 이슬람의 섬마을에 도착해보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바닷가에 나무로 엉성하게 집을 지은, 정말 가난한 마을이었다. 물 위에 박혀 있는 선착장의 기둥들은 거의 다 썩어버려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를 지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카누에서 내려 부두로 올라갔다. 부두에서는 차도르를 두른 30대의 아줌마 몇이서 액서서리를 팔고 있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보았더니 전부 액서서리나 소라 껍데기 등을 파는 영세한 가게들이었다. 외딴 섬이라 그런지 본토에 있는 물건보다 질이 훨씬 떨어져 살만한 것이 없었다. 3천원 정도에 해당하는 돈을 주고 소라 껍데기 하나만 사들고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선착장에는 어느새 어린 무슬림 소녀들이 나와서 풍경 사진을 팔고 있었다. 평소 같아서는 호기로 많은 물건을 사주었겠지만, 상처 때문인지 모든게 심드렁해진 나는 무관심하게 선착장에 앉아 있다가 아무것도 사지 않고 카누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련하게 무슬림들의 예배 음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음악 소리가 가슴까지 스며든다고 느꼈을 때, 미국에서 일어난 비극이 떠올랐다. 동시에 ‘대체 저런 작고 빈한한 섬에 정착해서 사는 빈민들, 그리고 소녀들에게 알라는 무슨 뜻을 숨겨 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보았다.

선착장에 있던 키 작은 서양인 하나가 쓸모도 없어 보이는 물건을 흔쾌히 사주고 있었다. 그는 물건을 파는 소녀에게 영어로 따뜻한 말을 해주면서 손까지 꽉 잡아주고 있었다. 황혼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바로 내 앞좌석에 앉아 갑자기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동안 나는 너무 내 생각 속에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값싼 물건 하나 선뜻 사주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가슴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보는 순간 내 마음속에 있는 무형의 구속이 풀어져나간
것이다.

‘오직 자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 감동의 순간에 그와 나, 그리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 너머로 펼쳐져 있는 바다와 섬들은 하나였다. 나의 가슴이 열리자 비로소 다도해에 떠 있는 섬들이 본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 밑으로 흘러가는 바닷물결은 어찌 그리 장엄한지... 그것은 내 가슴의 풍요로움을 일깨워주는 알라의 축복이었다. 알라는 모든 존재에게 자비를 보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이것이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 나아가 국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번에 미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삶,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바로 겸허함, 지성, 그리고 자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힘은 자비의 실천일 것이다.
응징은 또 다른 원한의 불씨만을 생산할 뿐이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불행의 근원적인 치유 또한 응징이 아닌 자비의 힘을 믿고 이를 따르는 데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테러의 씨앗은 이미 몇십 년 전 중동에서 발생한 전쟁의 원한과 불행, 그리고 경제적 혜택으로부터의 소외에서 싹튼 엇이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이 미국을 응징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 정당한가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국의 지성이 깨어나, 테러의 진원지는 소탕전이 아니라 자비의 실천으로만 소멸된다는 이 영원한 진리를 신뢰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정신을 실천해야 될 때이다. 그렇게 한다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미국인들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강력해지고 위대해지는 것은 전쟁의 수행이 아니라 바로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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