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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 지금여기 21호 
보도일자 : 200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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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호] 행복에서 출발해 사랑으로 완성되는 깨달음의 길 - 해피타오


   한바다 / 인터뷰 김흥숙


해피타오 프로그램을 통해 번민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한’ 깨달음의 길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는 한바다. 그가 깨달음을 찾아 헤맨 지 15년만에 도달한 곳은 ‘지금 여기’다. 행복, 사랑, 영원의 세계, 진리, 이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함을 체험한 그의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그는 말한다. 


“삶은 고(苦)가 아니라 기쁨이고 행복을 찾는 길이 아니라 행복에서 출발하는 길이다.”라고. 



해피타오 프로그램에 대한 개념을 먼저 간략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해피타오(Happy Tao)는 진정한 자기를 찾는, 특히 영성에 기반을 둔 자기 자신을 찾는 하나의 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재의식이나 집단의식 또는 주위로부터 들어왔던 나라고 제한되어 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상념들이 많거든요. 그 상념들에 짓눌려 자기 속에 있는 본성의 창조력이 억압당한 상태에 있단 말입니다. 그 껍질을 뚫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내면의 참된 자기, 그것을 찾으면 갑자기 생명력이 해방되기 때문에 창조력이 늘어나고 자신감이 커집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해피타오도 다른 정신개발 프로그램과 목적은 거의 같다고 봅니다. 


목적은 같으나 방법론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기존의 종교나 여러 가지 방법론이 많이 나와있는데, 개인한테 있어서 종교는 훌륭하고 보다 높은 영적인 진화를 위해 도움이 되지만 시간적으로 너무 길고 고행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이 불행해지거나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피타오는 삶은 고(苦)가 아니라 기쁨이다라는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삶은 기쁨이다’라는 그 발견에서 시작하고, 행복을 찾는 길이 아니라 행복에서 출발하는 길이다, 그게 바로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본래 모습은 행복하고 기쁨 그 자체라는 거죠. 


그처럼 삶의 바탕이 되는 행복과 기쁨을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정신의 축이 흐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허해져 있고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즉 바로 서 있지 않은 정신 속에서는 항상 물질에 기울어진다든가 또는 타인의 부정적인 의견에 빠지게 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 속에 있는 참된 자신의 힘이 안나온단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만 나오면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예요. 그리고 그것은 단 20분만에도 누구든지 바로 행복의 상태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몇 초만에도 들어갈 수 있죠. 그런데 일반적으로 잘 안되는 이유는 정신의 축이 흐트러져 마음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에 있지 못하고 항상 과거라는 생각에 끌려다니거나 미래라는 욕망에 끄달리니까 현재 나의 생명관이 단절되어 버린 거예요. 생명력이 차단되니까 행복할 에너지가 없는 거죠. 그런데 정신의 중심이 잡혀 현재로 돌아올 수 있으면 그 자리가 바로 행복입니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 자체가 100% 행복인데 불안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못 머물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정신의 축을 가다듬어서 현재 이 자리에 존재하는 것을 마음 공부, 즉 깨달음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행복과 깨달음의 관계에 대해 좀더 설명해 주십시오. 


15년 동안 깨달음의 길을 걸어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깨달음의 패러다임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정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각자(覺者)들이 영적으로 최고에 도달했을지라도 개인적 삶은 행복하거나 충만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즉 사회적인 형태나 인간적으로는 외롭고 불행했다는 거죠. 깨달음에 도달해서 자신은 밝음을 드러내려고 하는데 나오는 표현양식은 비관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들을 뒤따르는 사람은 허무를 주된 인생의 패러다임으로 봐버리거든요. 그러면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허무주의 인생관을 갖게 되는 겁니다. 저는 그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해피타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해피타오란 말은 뉴질랜드에서 직관적으로 인생은 일단 행복해야 되겠다. 모든 인류가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행복은 해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생명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그런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출발하자는 거죠. 그러면 나중에는 행복이 누구나에게 당연한 것이 됩니다. 

인간은 행복의 권역을 통과해야 진정한 인간이 되면서 사랑이든 뭐든 풍요롭게 나누어줄 수 있거든요. 행복권, 즉 우리는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충분히 행복을 경험하고 누려볼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권리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복 그 자체가 인류의 발전과 진화에 이바지하는 에너지 메트릭스가 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행복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멀고 높고 어려운 것으로 되어 있단 말예요. 그리고 행복하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그 점이 잘못된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겁니다. 행복하지 못하니까 폭력이나 전쟁이 나오는 거거든요. 내가 행복하면 전쟁이 나올 수 없고 사랑이 아닌 게 나올 수 없잖아요. 

행복해야 에너지 파장이 높아집니다. 그러면 에너지 자체가 높기 때문에 그 높은 파장은 자동적으로 주위에 영향을 미칩니다. 행복한 사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 되겠다, 남을 기쁘게 해줘야 되겠다는 영감이 자꾸 떠오르게 되죠. 행복한 사람은 자기도 넘치기 때문에 자꾸 나누어줄 수 있는 마음이 돼요. 그러니까 행복은 그 자체로 엄청난 진화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행복은 권리이자 지구에 건설적으로 이바지하는 하나의 길이 되는 겁니다. 그게 전체 인류가 당면한 진화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해피타오에서는 그 행복은 미래가 아니고 당장 이 자리, 지금 이 자리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선언에서부터 나온다고 봅니다. 


행복의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적인 조건이 ‘선언’이라는 말씀입니까? 


선언해야 나옵니다. 선언하고 확인하는 거죠. 그 방법론은 마음의 중심 축을 바로 세워서 내가 현재 나의 생명을 바로 보기만 하면 됩니다. 행복은 내가 나를 100% 긍정하고 사랑할 때만 나옵니다. 참된 나와 하나가 되면 남의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이 나는 떳떳한 거예요. 그러면 자신감, 창조력, 남에게 봉사하고 싶은 마음, 친절, 이런 게 나올 수 있거든요. 그럴 때 행복이 나오죠. 저는 그것을 기본 매트릭스로 해서 깨달음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행복을 기본으로 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갔을 때 깨달은 사람한테서 나오는 파장은 엄청난 축복과 지복으로 되어 있거든요. 지복은 행복과 같은 건데 보다 더 질적으로 높은 기쁨이죠. 깨달음의 밝은 광명에서 나오는, 즉 어둠이 전혀 없는 순수한 광명의 세계죠. 그 에너지가 바로 현실화되어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는 행복을 거치지 않으면 파괴적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로 봤을 때 예수님도 파괴적으로 나왔거든요. 그게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뒤에 그를 따르는 사람의 패러다임은 삶을 부정하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현재 인류의 기본적인 집단적 잠재의식에는 인생은 불행하다, 고다, 삶은 힘들다, 이것으로 일관되어 있거든요. 그건 일종의 최면입니다. 그런 집단적인 상념의 최면에 사로잡혀 있는데, 일단 과감하게 ‘인생은 행복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의연한 정신의 힘이 나오거든요. 


선언 자체가 바로 에너지가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그것으로서 출발하는 거죠. 그리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확인하러 가는 겁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파괴적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지-- 


예수님 자체가 파괴적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고의 성취(?)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이 파토스적으로 나갔잖아요. 파토스적으로 나가다 보니까 주위에 비친 게 파괴적으로 비쳤죠. 그러니까 당시의 사람들이 죽인 겁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 사회를 전면적으로 바꾸려고 했다는 것은 사회를 부정한 셈이거든요. 그 당시 현실 자체를 대체로 부정해 버렸거든요.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물질 탐욕에 빠져있으니까 부정해야 하느님 나라로 간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나중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삶을 부정했다고 해석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먼저 행복을 깨우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저의 비전이나 메시지는 지금 당장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고 행복을 통해 갔을 때 가장 빠르게 도달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행복을 통과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까지입니까? 


행복권역 다음에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사랑 그 자체로서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을 100%로 누리고 경험하면 온전한 진실과 만나게 됩니다. 그 진실이 바로 자신의 본성입니다. 자기 자아가 완전히 깨어나는 것이죠.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지금까지 진아, 참된 자아에 대해서는 어디서나 수없이 많이 언급되고 있지만 대부분 추상적입니다. 참된 자아에 대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종교적으로 참된 자아는 많이 가르쳤는데 막연하고 추상적입니다. 구체적으로 참된 자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자아가 뭐냐를 알기 위해서는 참된 자아가 아닌 것을 살펴봄으로써도 접근이 가능합니다. 참된 자아가 아닌 것은 우리가 주위에서 들은 생각들, 인생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생각들, 쉽게 말하면 신념들입니다. 특히 부정적 신념들, 그리고 잠재 의식에 묻어있는 신념들, 부정적 패턴들이죠. 이런 것들은 자기가 아니고 자기의 한 편린들입니다. 의식과 잠재 의식은 자신의 한 부분들이예요. 그리고 신념은 잠재 의식과 현재 의식에 붙어있는 상념의 편린들, 알갱이들이죠. 잠재 의식과 현재 의식은 나의 일부분이고 그 일부분의 작은 파트를 차지하는 것이 상념들, 신념들이죠. 이러한 것들은 나의 생명이 분출해낸 하나의 분신, 즉 내가 마음으로 만들어낸 것(창조물)들입니다. 참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천성적인 나예요. 나라는 것은 누구나 명명백백하거든요. 

그런데 그 이전까지는 우리가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거든요. 나는 이렇다, 나는 저렇다. 그것은 나라는 의식이 있고, 나라는 생각에 의해 얼굴의 형상이나 ‘나’라는 입장이 취해지잖아요. 그것은 진짜 나는 아니고 분신이나 가아(假我)라는 겁니다. 그것을 다 지워내면 나의 생명력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아니라고 했을 때 마지막으로 남는 나 있음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미지화 되기 이전의 나의 생명, 그게 진짜 나란 말입니다. 


참된 나가 깨어나면 현실 속에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납니까? 


참나로 깨어나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엄청난 창조력과 더불어 자신감과 용기가 나오죠. 그리고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신념이나 집단적인 의식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깨어나야 창조력이 작용하고 결국 역동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됩니다. 이것은 또 어떤 것에 의해서도 잃어버릴 수 없는 진정한 우리의 밑천이죠. 


집단적인 의식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카르마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카르마는 나의 생각이 만들어내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그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죠. 사실 우리들 잠재 의식에는 의식화되지 않은 불행의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불행의 밑 프로그램이 있단 말예요. 숨어 있어서 의식이 안되는 잠재 의식의 밑 프로그램인데,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똑같은 실수나 불행한 패턴을 계속 만들어 냅니다. 끌려 다니는 거죠. 그것은 그것대로의 요구사항이 있거든요. 강박 관념적인 요구, 그것 때문에 불행한 경험을 반복한단 말입니다. 그 에너지는 불안하고 뭔가 기분 나빠지니까 보통 사람들은 도망가 버립니다. 다른 사람한테 이해를 받으려고 하거나 동정을 기대하죠. 그런데 진아가 깨어나면 그것과 직면하게 돼요.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직면하는 것, 즉 의식 차원에서는 몰랐지만 나의 잠재 의식에 입력되어 있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것은 잠재 의식이기 때문에 주관적인 체험으로 오는데,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면 떨어져 나갑니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그것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떨어져서 바라보면서 의식화시키는 거죠. 의식화된다는 것은, 현재 의식으로 올라와서 없어지려고 하는 거거든요. 마치 누룽지가 처음에는 들러붙어 있어서 물 위에서는 안보이지만 나중에 불어서 떨어지면 물위로 떠오르듯이 의식이 깊어지면 잠재의식이 불어나면서 떨어져 올라오죠. 내 현재 의식에서는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오지만 직면해 보면 그것이 나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게 돼요. 다만 그런 것을 우리가 못보기 때문에 그 에너지에 끌려다니면서 주로 외부로 투사가 됩니다. 인간이 불행하고 자꾸 싸우고 갈등하는 것은 스스로 인식이 안되기 때문에 자연히 외부 대상한테 투사되거든요. 그런데 내부에 이런 에너지가 있으면 인간 관계에서 사랑을 원해도 자꾸만 비틀리면서 사랑을 못받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죠. 사랑하려고 남에게 자꾸 퍼주는데 나중에 생각하면 자꾸 억울한 마음만 남는 거예요. 그것은 잠재 의식에 붙어 있는 불편한 에너지, 즉 나는 사랑을 충분하게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나 그밖의 불편한 생각들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자기가 그 에너지를 고치면 되는데 직면을 안하니까 못고치고 세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영원히 해결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럴 때 직면하라는 겁니다. 진아가 깨어나고 난 뒤에 직면하면 그것이 나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알게 돼요. 다른 사람이 미워 보이고 잘못되어 보였던 것이 나의 잠재의식에 숨어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것이 떨어져 나가요. 반드시 객관화 되면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것이 진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예요. 즉 완전히 잠재의식의 업장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포인트인데, 사람들은 그게 두려워서 도망가거나 아니면 카오스로 들어가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식하고 직면, 직시하는 것을 해피타오에서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해줄 수도 없고 자신이 해야 되고, 또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되면 인류 의식이 밝은 쪽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무한대의 의식, 참나와 하나되는 것이 사마디인데, 이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 삼매가 나옵니다. 즉 무한대의 우주 의식과 하나가 되는 현상이죠. 내가 삼라만상, 우주만물과 일치가 된다는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온 몸 전체로 느끼는 겁니다. 그 체험을 통해 진짜로 아는 거죠. 그 체험으로 들어가면서 완전한 밝음, 기쁨과 하나가 돼죠. 


진아가 깨어나면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우선은 내가 사랑과 행복의 파동을 경험해서 알아야 됩니다. 사랑과 행복의 파동을 경험한 사람은 그 자체의 파동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남을 돕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몸으로 직접 도와줄 수도 있고, 또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대를 충분히 배려하면서도 도움을 주거나 의견이나 통찰력을 제시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 못할 경우 멀리서도 도울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사랑과 행복의 파동대로 들어가서 그 사람을 밝게 떠올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때 그 사람의 부정적인 상념이 떠오르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인상이면서 동시에 그 에너지는 그 사람한테 전달됩니다. 우리는 하나기 때문에 니 건지 내 건지 구분이 안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한테 비친 것에 빠지지 말고 비전에 초점을 맞추라는 말입니다. 즉 이 사람의 밝은 부분에 초점을 두라, 그리고 그 상태를 축복해주는 거예요. 진심으로 지극하게 그 사람의 밝은 모습을 계속 축복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기운을 받습니다. 그런데 잘못되면 어떡할까 잘 돼야 되는데 하고 마음을 쓰면 도움이 안됩니다. 그건 결국 그 사람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거거든요. 


잘 돼야 되는데 하고 걱정하는 것은 이미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죠.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은 부정적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면 나의 에너지가 그리로 쏠려요. 그러면서 그걸 증폭시켜 버린다구요. 특히 영성으로 진화한 사람은 염력과 영능력이 강하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을 온전하고 밝게 써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과 사랑을 100% 경험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걸 경험한 사람만이 그 에너지를 순수하게 창조해 낼 수 있거든요. 그래서 행복과 사랑은 의무 사항이기도 해요. 내가 그런 느낌 속에서 그 사람이 부정적이더라도 다 축복을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자꾸 밝은 쪽으로 생각하면 그 사람의 영이 그걸 받아요. 영이 받아서 순간적인 용기가 올라온다든가 또는 가이드가 생겨서 어느 쪽으로 가라고 안내한다든가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밝은 데 초점을 맞춰서 그 사람을 기도해 주는 것 자체가 엄청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을 조금만 내면 누구나 할 수 있거든요. 영혼의 세계는 이어져 있기 때문에 누구나 믿고 하면 됩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행복과 사랑의 에너지로 출발하기 위해 현재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인류 의식은 많이 진화되었지만 인류의 집단 의식의 밑 프로그램에 있는 동물적인 야수성과 부정적인 자기 신념들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가 서로 다른 사상과 종교로 인한 싸움을 끝내고 지구가 한 가족이라는 것, 그것까지 진화하는 것이 인류의 목표예요. 즉 모든 인간의 문화를, 다른 인류들의 문화를 나의 문화로서 인정하고 그것을 찬미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종교라든가 다른 인류가 이룩한 것은 결국 내가 이룩한 거거든요. 내가 지구까지 확장되면 다른 사람이 이룩한 경지는 결국 내 안에서 내가 이룩한 경지와 똑같은 거잖아요. 어쨌든 미래 세계는 창조적이고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풍요라는 것은 정신없이 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온전히 서 있는 상태에서 물질을 풍성하게 가꾸어내는 것이 진정한 풍요거든요. 그런데 보통 우리는 풍요를 굉장히 빈곤한 의식으로 쓰고 있어요. 즉 내가 많이 소유하고 누려야 풍요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빈곤 의식의 투사에 불과하거든요. 진정한 풍요는 내면에 있는 풍요의 가난한 마음을 버려야 됩니다. 한민족의 비전으로 본다면 한정신을 회복하는 거죠. 한단고기 이래 내려오는 인류 문명사적으로 볼 때 한정신은 아주 중요합니다. 


한정신은 무엇입니까? 


‘모든 인류와 지구는 하나다’라는 정신입니다. 그리고 외부 의식과 무의식이 분리되어 있는 것을 통합시키는 것, 그게 한사상이고 한정신입니다. 영어로 하면 홀리스(Holis)죠. 우리는 지금 민족적으로 자기 정신(중심)을 잃어버리고 일본, 유럽, 미국 사상에 현혹되어 있다구요. 인류가 한 의식체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건데, 자기 중심을 잃어버린 것은 줏대가 없는 거예요. 우선 자기 중심축을 찾아라. 주인이 자기집은 버리고 남의 집에 가서 잘 한다고 그게 좋은 건 아니거든요. 진정한 협력이 안됩니다. 자기 집을 살려야 돼요. 내가 의식하지 않고 있어도 내 코스모폴리탄이거든요. 최근에 나도 한국인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단 한국인이면서 지구인이고 우주인이잖아요. 

한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한나절’, ‘한바다’ 등 크다라는 뜻도 있고, ‘한낮’과 같이 중심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한’은 지금 여기라는 말입니다. 한은 공간과 시간적으로 지금 여기이고, 지금 여기는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또 하나예요. 결국 그것은 하늘이거든요.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다 포함한 것이 하늘이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전 보편적인 우주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홍익인간과 밝은 이념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항상 어디에 내놓아도 정대합니다. 

제가 우리나라 전통 종교인 천부경 삼일신고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그것은 단순히 한국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동북아 사상의 원류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천부경에는 천지 이치와 인간이 깨달음을 얻는 이치가 다 들어 있습니다. 즉 본성의 빛을 밝혀서 우주를 완성하는 이야기가 천부경에 다 들어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인류 최고의 경전이고 단순히 한국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에서 발현되어서 전세계로 퍼져가는 밝은 사상의 문명, 그것의 주류예요. 불교에는 하느님의 사상은 없지만 깨달음에 대한 사상은 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상은 있지만 깨달음의 사상은 없잖아요. 유교는 인간에 대한 사상은 있지만 다른 건 빈약하단 말예요. 그런데 삼일신고에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인간의 자기완성, 즉 깨달음의 길, 그리고 기독교 사상이라든가 불교, 도교사상 등 모든 정신이 융합되어 있습니다. 그건 저도 몰랐는데 영문으로 번역을 해보니까 그 뜻이 선명해지더군요. 그 다음에 호흡을 통해 수명을 연장하는 비법들이 다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인류 사상의 원본이 되는 거죠. 제가 볼 때는 그 사상의 한쪽 지류로서 기독교, 불교, 유교, 신선도도 나온 것 같습니다. 제가 한단고기를 읽어보고 직접 수련을 해보니까 가장 밝고 정대해요. 

우리가 마음만 닦는 쪽으로 가다보면 생명력이 허해집니다. 명상이나 수련만 하고 인간 관계에서 제대로 못하면 풍요롭지 못하고 허해지거든요. 삭막해지는 거죠. 한편으로 정신 공부하면서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면 자만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런데 한은 총체적인 거 아닙니까. 우리가 완성이라면 인간이 총체적인 우주로 완성되는 거거든요. 그 사람 내면에 있는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중심축으로 어우러지는 거거든요. 그것이 인간 완성인데 삼일신고에 바로 그 비밀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좋은 정신 문화를 밝게 살리고자 하는 거죠. 


깨달음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비범한 순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요가 명상을 하던 중에 시간과 공간이 없는 무한대, 영원한 시간, 무한한 공간, 이 지구마저 없어지는, 우주까지도 없어진 그 세계에 몰입했었습니다. 실제 나라는 의식 자체도 없고 절대 의식만 있더라구요. 내가 그걸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렇게 완전한 축복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런 무한대의 비전이 나타난 동기는 있었습니다. 그 동기는 하나의 암시와 비슷한 건데, 저한테서 본질의 세계로 돌아오라는 강렬한 생명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들렸어요. 그때 주위에는 굉장히 많은 어린아이들과 여인, 순수한 인간들이 많이 있었죠. 소도 한 마리 보이구요. 선명하게 보였어요. 그때 영원의 세계로 돌아가야 되는데 저 사람들도 같이 데리고 가야 된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선문답처럼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영원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은 실줄처럼 가늘어서 나 혼자서 타고 올라가도 떨어질 정도인데,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그들을 다 데리고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생각은 1초안에 명멸했습니다. 내 속에서 갈등이 순간적으로 명멸했지만 다 함께 가자, 줄이 끊어지더라도 일단 다 같이 가자 하고 선택하는 순간에 천둥이 쾅하고 치더니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로 들어가 버린 거예요. 무한대의 세계죠. 그 세계에 들어가 보니까 모든 생명의 근원이 바로 이거구나, 그런데 그것도 한 생각이고 그 다음에는 무한대의 세월에 제가 존재한 거예요. 지구 시간으로는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도 모르겠는데, 거기 들어가보니까 영원토록 내가 거기 있었고, 그 생명의 세계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아버지와 같은 차원, 부모와 같은 차원이더라구요. 그 세계를 빠져나오니까 인생이 사는 게 아니더라구요. 그 절대적인 세계에 비해서 이 세계는 너무나 유한하고 표피적인 삶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존재를 위해서 무엇을 해주어야 되나, 그런데 아무것도 해줄 게 없더라구요. 돌아오고 난 뒤에 이 세계와 그 세계 사이에서 갈등을 했었고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강열한 마음은 있었지만 제 삶은 진행되었죠. 그 후 우리 선친께서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을 살려 보려고 모든 노력을 다 했었습니다. 신비의 영약도 찾아가고 기독교로 개종해서 집사한테 안수기도도 받아보았죠. 그런데 결국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에 영원한 세계가 현실화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냥 이 순간이 바로 그 세계더라구요. 우리가 이렇게 있는 이 순간, 여기가 바로 그 세계인데, 마음으로 그 세계와 이 세계가 다르다는 상념이 남아 있었던 거죠. 그 세계가 이 세계 안에 있고 이 세계가 그 세계 안에 있더라구요. 그걸 아버님 돌아가신 순간에 깨달았어요. 아버님이 임종하시는 순간에 엄청난 절대적인 사랑이 흘러나오면서 가슴 속 생명의 세계가 완전히 깨어났어요. 그때부터 지난 세월들이 전부 다 이해가 되고 해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신성한 삶을 실천하는 쪽으로 가게 되었죠. 


명상 중에 체험하신 영원 무한대의 세계를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좀더 설명해 주십시오. 


영원 무한대의 세계는 마음 하나를 온전하게 쓰는 것과 똑같습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마음을 온전하게 쓰는 것이 진짜 도(道)구나 그런 메시지가 온 거죠. 내가 이기심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남에게 음식을 하나 준단 말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영원 무한대의 세계와 같은 마음의 질료예요. 패러독스잖아요. 그때 그 순간에 제가 혼자 가야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그 세계에 못들어 갔을 거예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같이 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리로 들어가버린 거거든요. 즉 자기 이기심을 버리는 순수한 여정과 영원 무한대의 세계는 같다라는 겁니다. 그걸 발견하고 제가 ‘아, 마음을 온전하게 바로 써야 되는구나.’ 깨닫고 그때부터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버렸습니다. 그 이전에는 명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밖에도 여러 가지 나름대로 깨어남의 체험을 많이 했는데, 저한테는 그 사건이 가장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해피타오를 체험한 사람들 중에는 한바다님에게 스승에 대한 애정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내면의 투영이라고 한다면 한바다님의 삶의 의도가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가야 되겠다는 스승의 아이덴티티를 취해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것은 해피타오와 상관없는 개인적인 감정 차원의 문제입니다. 해피타오는 기본적으로 그런 체계가 아니라 페어플레이예요. 시장 거래 법칙에 의한 페어플레이라구요. 그게 가장 기본이죠. 하지만 때로 영성적인 데 있어서는 스승의 역할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자발적인 의사여야 되지 남이 강요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것은 자기 가슴이 깨어났을 때 드러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각자 특성대로 주관적으로 체험하지만 행복의 파장은 객관적입니다. 행복의 파장대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올라간 사람일수록 행복의 파장대가 높아지고 직관이나 에네르기가 높아집니다. 그 에네르기를 존중해 주는 거죠. 그건 인도에서 내려온 전통인데, 그 높은 에네르기를 일반인들이 경험하려면 자신의 카르마가 두껍기 때문에 안보입니다. 그래서 안되는 쪽으로만 에너지를 씁니다. 나는 안된다로 가득 차 있다구요. 밝은 에너지로 펼쳐져 있는 것은 눈으로도 보지만 마음의 눈으로도 보거든요. 마음은 그것을 흡수합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3세 업장이 녹는다고 했거든요. 그건 사실입니다. 만나는 자체로서 그 사람의 깊은 의식 속에는 깨달음에서 나오는 허 에너지, 즉 무심의 기운이 있어요. 신지학에서는 그것을 아가페라고도 하고 또는 카이로스, 은총이라고 하거든요. 개아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사람한테는 광명체가 나옵니다. 그 광명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들어가면 잠재의식의 카르마 업장들이 녹아내립니다. 그런 것을 세포가 한번 경험(공명)했을 때 나도 가능하구나 하는 쪽으로 가게 되죠. 그래서 사람들이 스승한테 경배하는 겁니다. 경배하는 이유는 내가 그 에너지를 얻으려면 그 에너지에 경의를 표해야만 얻을 수 있거든요. 그 에너지를 미워하면서 얻지는 못하잖아요. 그것은 사물 거래의 법칙이거든요. 자연법칙이란 말입니다. 내가 뭔가를 주어야 받는단 말이죠. 나한테 다 있는데 왜 주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다 있기는 하지만 인류의 잠재 의식의 업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게 더 많아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지도와 가이드라인과 보호파장이 있어야 됩니다. 살아 있는 스승뿐만 아니라 다른 계의 스승도 있어요. 바른 길을 가면 그 스승들이 도움(에너지)을 줍니다. 그러나 내가 그 에너지를 의심으로 막아버리면 못받겠죠. 


의심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요? 


제 경험을 들어보면, 제가 만리동에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을 스승으로 모신 적이 있습니다. 단식에 실패해 몸이 망가져서 죽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당시 84세된 그분을 찾아가 약을 처방받게 되었어요. 그분은 한의사이면서 한국 도가적으로 도통한 분이었습니다. 약을 받으면서 왠지 의심이 들어 먹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배가 아프고 창자가 꼬여서 발광이 나더라구요. 저와 같이 갔던 후배는 할아버지가 준 약을 지니고 다니며 열심히 먹었는데 그에게 약을 좀 달라고 해서 먹었어요. 그런데 먹는 순간에 너무나 신비하게 쫙 풀리면서 ,그때 할아버지가 성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엄청나게 마음을 잘못 썼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후 다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제가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형식적이었거든요. 제가 온전한 마음으로 절을 해보니까 치유의 파장이 물밀듯이 내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거예요. 그 사람 자체가 약이더라구요. 그것을 제가 의심으로 막고 있었던 겁니다. 그 순간 약의 파동 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았어요. 그 분의 온 존재가 약이더라구요. 그때 저는 의사도 진정한 달인이라면 존재 전체가 약의 장으로 이루어져야 되고, 부처라면 지혜 그 자체로 이루어져야 되고, 음악인이라면 그 사람 존재 전체가 멜로디여야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여는 것과 닫는 것은 엄청난 차이예요. 지각이 달라지니까 그때부터 만남도 달라지고 체험까지도 달라집니다. 지각을 바꾸는 것, 즉 한 존재를 선입관 없이 온전하게 마음을 열고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체험했죠. 결국 의심은 나의 생각의 반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아픈 경험을 통해 더욱 분명히 체험하게 된 거죠. 그런 통찰의 경험들이 스승이면서 하나의 메시지예요. 진아가 깨어나면 스승과 나라는 구분은 없어지고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스승에 대한, 온전한 사람에 대한 예우와 존경심은 남아 있다구요. 우리가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있듯이, 스승은 자기의 영혼을 깨워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존경심이 남는 거죠. 까비르도 스승은 나의 눈을 열어주었네 하고 노래했거든요. 실은 스승이 해준 게 없어요. 만트라 하나만 던져주었거든요. 그걸 통해서 그가 깨달았고, 깨달으니까 전 우주가 자기란 말예요. 그만큼의 감사함이 남아 있는 거죠. 그래서 그는 스승을 찬미하는 노래를 계속 불렀어요. 그것은 그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표현한 거죠. 스승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지극함이 감사함으로 나온 겁니다. 현재 우리는 민주주의 교육을 많이 받았고 스승을 상하 관계로 생각하는 유교적인 습성 때문에 두려워 한다구요. 그러나 실제로 스승이라는 경험은 해볼만 합니다. 스승도 되어 보고 제자도 되어 봐야 자아가 움직이는 방식이 얼마나 교만한지를 알 게 됩니다. 그 다음에 그걸 넘어서 완전합일의 체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외국에서는 불교를 한국사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도 한국 사상이지만 근본적인 원류는 삼일신고의 한정신이거든요. 천부경 삼일신고에는 불교에 대한 뜻도 다 들어 있다구요. 그래서 앞으로 인터넷을 통해서 한사상을 전세계에 알릴 계획입니다. 우리 것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예요. 세계 다른 나라에도 한사상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서로 연결해 줌으로써 대화의 통로가 열리면 모든 사상은 원래 하나였구나 하면서 지구 의식 자체가 진화하는 거죠.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한국 사람의 깊은 정신과 세계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데 있어서 저는 하나의 대행자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 집단 잠재 의식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밝고 창조적이고 리더쉽도 강하고 굉장히 좋은데 남북으로 가로막히다 보니까 한이 부정적으로 변해버린 거예요. 이것을 밝게 하는 것은 결국 정신을 밝게 하는 길밖에 없어요. 치유도 끝이 없는 거고 결국 정신을 바로 세워주는 건데, 그 정신의 원류는 이거다 이 말입니다. 각자 이걸 통해서 가다 보면 우리 속에 있는 거대한 생명의 힘과 만나게 돼요. 그것은 우주와 통하는 문이죠. 그럼 우리가 굉장히 밝고 위대한 존재라는 걸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써 세상이 밝아지는 거죠. 저는 그에 대한 전달자 역할을 하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내사 저널 ‘지금여기’에 대해 평소 생각해오신 것이 있으면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 여기라는 것은 어찌보면 세속적인 것으로도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라는 것은 영원이라는 것, 그런 차원에서 더 밝은 쪽으로 가는 현실적인 비전 하나를 설정해서 그것에 에너지를 투입하도록, 왜냐하면 비전이 있어야만 지금 여기가 강화될 수 있거든요. 더 충실해지잖아요. 예를 들면 비전 없이 현재만 있다면 사람은 정물적인 쾌락에 빠질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말한 지금 여기는 더 밝은 미래를 이끌어가는 지금 여기가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명확한 비전, 달성 가능한 비전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시면 지금 여기가 더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여기’를 통해 다양한 사상을 소개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이라든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지금 시대적인 상황으로는 불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역할을 용기있게 해주는 미내사에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동시에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서양적인 정보가 많이 나왔는데, 한국의 정신과 생활 속에서 깊이가 나올 수 있는 측면도 보완이 되면 균형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미국의 얘기는 영감이나 새로운 비전으로는 좋거든요.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안맞는 면이 많습니다. 현실 속에 접목해야 진정한 내것이 될 수 있지요. 그것만 부탁드리면서 저도 미내사 활동에 늘 마음으로부터 성원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끝으로 세상 사람들한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진리의 길을 같이 가는 사람들이 선택한 방법론이 어떤 형태든지간에 그것이 아봐타든 단학선원이든 한사랑이든지, 우리의 궁극적인 진화의 목표는 하나라는 것, 그리고 지구와 인류와 우주도 하나라는 것, 그것만 있다면 우리는 서로 돕고 서로 화합해서 가는 길을 새로 창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모범을 보임으로써 미래 세대에 하나의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렇게 노력하도록 기도하는 마음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행복과 진실은 똑같은 것, 행복한 사람이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인간의 선천적인 권리니까 모든 사람이 언제나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이 순간에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말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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