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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해방, 본체와의 합일

잡지 조회 수 12886 추천 수 1 2012.07.23 23:03:58
매체 : 참좋은이들21 2011-9호 
보도일자 : 2011-08-25 

마음의 해방, 본체와의 합일

- 완전환 개화, 삶의 완성을 위하여

한바다 해피타오 인터내셔널 대표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인식에 아로새겨진다. 우주에 대한 인식에는 각자의 경험, 각자의 지식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주를 이야기하려면 인간의 의식구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을 이야기하려면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대해, 그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로부터 인류는 무한한 세계와 영원성을 꿈꾸어왔다. 인류 역사상 용감한 소수들은 다수의 현실세계에 갇혀 살기를 거부하고 그 너머의 무한한 세계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열망하였다. 무한한 세계에 대한 열망과 동경은 많은 이들을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나서게 했고, 오늘날에는 지구권 밖의 우주까지 탐험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땅과 바다를 다니고 우주로 다닌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자신의 내부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며 갈등구조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마음과 영혼에 대해서 깜깜하게 모르고 있다면, 그는 무지한 존재에 불과하다.
안팎의 우주는 인간의 인지가 미치지 못하는 무한한 파동의 세계이며, 우리가 인식을 제대로 다 하지 못하는 물질우주뿐만 아니라 비가시적 영역의 미세한 진동으로 이루어진 세계들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세계들이다. 붓다는 이러한 세계가 삼천 대천 세계라 했다. 이에 대해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좁은 인식 영역에 불과하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그 내면은 무지로 가득하다. 그러한 무지로 해서 자신의 생각과, 생각이 일으키는 갈등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부에 무한한 미답지(未踏地)가 있으니, 이것은 인간이 발견해야 될 새로운 보물섬이다. 자신에 대한 앎이야말로 가장 가치있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우주를 향한 열망에 휩싸였고, 이 우주 너머에 또 어떤 세계가 있을까 늘 궁금했다. 여름밤이면 바깥에 나가 모깃불을 피워놓고 밤하늘의 은하를 바라보곤 했다. 그때 나의 의식은 땅을 떠나 무한한 우주로 빨려들었다. 밤은 살아 있었다. 땅도 살아 있었고 공기도 살아 있었다. 때문에 밤하늘의 은하는 그냥 그대로 살아 있는 음악이었다. 우리 자신도 그 음악의 일부였다. 그때의 나는 자신이 어디 있는 줄도 몰랐다. 다만 밤하늘의 은하 속을 정신을 잃은 채 유영하였던 것이다.


2. 인간 존재는?

인간은 우주 속에서 어떤 존재일까? 인간은 어떤 가치를 지녔을까? 인간은 우주와 땅을 잇는 존재이다. 인간 속에는 우주와 대지가 다 들어 있다. 인간 내부의 신성(神性)이 깨어났을 때, 가슴은 태양처럼 빛나고, 그의 신성한 에너지는 대지를 성화시키며, 대지와 우주를 연결시킨다. 우리 선조들의 천··인은 하늘과 유성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사명을 나타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경전인《천부경》에서는 신성을 회복하여 자기 내부의 우주를 완전체로 만든 존재, 즉 깨달음을 완성한 존재를 ‘본심본태양 앙명 인중 천지(일本心本太陽 昻明 人中 天地一)’ 이라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표면적인 인식의 생각으로 볼 때 인간이 우주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알기가 힘들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되지,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영원성, 즉 영성과 신성에 대한 고결한 추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과 같은 심성과 동물, 혹은 아수라 같은 심성을 공유한 독특한 존재다. 만일 인간이 정신적 혁명을 이루어 자신 속에 있는 동물적 심성과 아수라적 심성을 극복하고 신과 같은 심성을 발현하기 시작한다면 전혀 새로운 삶이 그 앞에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 영성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몸 속에는 신성을 지각하고 대우주로 나아갈 수 있는 기관들이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인간이 혁명을 이루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3. 인간의 영적인 통로(인체의 신비기관)

우리 몸에는 육체와 신성한 생명 파동을 감지하고 영혼에 대한 앎을 높여 주는 센터들이 존재한다. 이런 센터들은 우리의 의식 속에 신의 인식에 대한 감응을 일으킨다. 숭고한 사랑, 예지력, 신성에 대한 감사함, 우주에 대한 열망과 빛의 체험들은 이런 센터들의 작용이다. 하지만 이런 센터들은 단지 씨앗으로 존재할 뿐이다.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이 가능성의 중심들을 인식하고 자각적으로 키워내기 전까지는 단지 어둠의 영역에 남아 있을 뿐이다. 명상은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수련이다. 인식 영역 바깥의 단지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높은 센터들을 깨워내고 길러가는 과정이 바로 명상이요 수련이라 할 수 있다. 고대 한국의 성현들은 이를 성(性)·명(命)·정(精)의 원리로 파악했다. 인류 최고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천부경》은 미현현(未顯現)된 신의 세계, 우주의 형성 원리, 인간이 본심(本心)을 회복, 태양 같은 존재로 화하여 완성된 우주로 복귀하는 과정을 가장 짧은 문장으로 표현했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 센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 채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판에 박힌 진부하고 루틴한 삶 속에서는 세속적인 상념과 감정만을 주로 체험할 뿐이다. 이런 중심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드문드문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암벽등반 같은 극도의 위기상황, 또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극치의 각성 상태에서 돌연 깨어나 생기와 빛, 그리고 은총으로 충만한 세계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런 센터의 작용은 인간의 의식에 강렬한 인상을 남김으로써 이전과는 전혀 다른 운명을 경험하게 한다. 이때부터 상향(上向)에의 열망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뭔가 다른 충만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기 시작할 때 인간은 구도의 여정에 나서게 된다. 인간이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센터들의 깨어남이다.
이 센터들은 크게 지성·감성·체성의 가장 심오한 중심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예지(叡智)의 중심, 아가페의 중심, 생기의 중심이다. 이 중심들은 영적 파동을 내고 또 지각할 수 있는 독특한 영적 호르몬 체계와 상호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예지의 중심은 송과선·시상하부·뇌하수체 등과 관련되어 있다. 예지의 중심은 빛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우주지혜·직관·무한한 행복·은총 등의 경험의 바탕이 된다. 명상이나 깨달음 등을 통해 이것이 100% 깨어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우주의 미아(迷兒)가 아니라, 신이라 할 수 있는 현현되지 않은 우주와 자신의 생명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① 예지의 중심은 신지(神智)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이다. 예지의 중심은 우주의 율려, 즉 도(道)를 원리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근원이다. 우리가 언어적으로 인식할 때 중심이란 딱딱하고 고정불변인 어떤 것이라 상상될 것이다. 하지만 영적 중추인 중심에 이르렀을 때 중심은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심원하게 확장되는 생명의 흐름이다. 이를 고대에는 율려라고 했다. 즉 중심에 이르렀을 때, 아니 중심이 깨어났을 때는 무한감, 영원에 대한 경외감과 감동, 나아가 삶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사랑이 뿌리내릴 수 있다. 이를 ‘거듭남’ 또는 ‘깨달음’ 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때문에 중심은 ‘중심이라 할 수 없는 중심’ 으로, 이 중심이 항구적으로 깨어날 때 우리 의식은 빛과 사랑의 고차적인 파동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예수가 구원이라 말한 것은 바로 카르마의 근원이 되는 저급한 상념파동이 떨어져 나가고 ‘고차적인 생명의 중심이 내는 빛의 파동을 의식이 먹고 사는 상태’ 를 말한다. 예지의 중심이 내뿜는 우주 에너지, 즉 고진동의 빛이 항구적으로 인체와 의식에 작용할 때, 그것은 하나의 고차적 에너지장으로 되어 자리를 잡게 된다. 이 진동권을 고대에는 성(性)이라 불렀다. 법신체(法身體)이다. 법신체는 신지학(神智學)과 같은 신비계통에서는 아트마체에 대응한다. 아트마체는 자아의식이 떨어져 나갔을 때, 우주가 자신 속에 있음을 깨닫는 심원한 자각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구르제프는 이를 ‘상위 지성 센터’ 라고 불렀다.


② 아가페의 중심은 흉선, 갑성선 호르몬 등의 분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아가페의 중심은 가슴 약간 뒤쪽에 있는 씨알만한 크기로 존재하며, 예지의 중심에서 오는 고차적 우주 에너지, 즉 빛의 파동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소유욕이나 저급한 상념에 물들지 않는 참사랑의 근원이다. 남녀간의 일반적인 사랑도 이 센터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지원받지만, 이때는 소유욕이나 편견, 또는 과거의 경험 등이 묻어 나가는 상태로서 완전한 사랑이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아가페의 중심은 예수가 말한 사랑과 붓다의 자비로 표현되는, 한계 없고 조건 없는 사랑의 자리이다. 평화와 지순한 행복도 이 센터의 기능이다. 이것은 감정의 빛깔을 타고 나타나지만, 흔히 말하는 감정과는 아득히 먼, 순결하고 영롱하며 아름다운 감정이다. 아가페의 중심은 붓다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문이라 볼 수 있다. 사고나 감정이 떨어져 나갔을 때 인식되는 ‘참나의 세계’ 는 바로 이 가슴 뒤에 있는 씨알만한 자리에 대한 감각을 가리킨다. 하지만 진정한 참나는 미세한 자의식마저 떨어져 상위에서 오는 빛이 이 중심까지 내려왔을 때만 지각될 수 있다. 이런 상태를 ‘가슴 열림’ 이라고 하며, 깨달음이라고 하는 해탈권의 초입 상태다. 영어로는 인라이튼먼트(enlightment), 즉 빛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고대 한국의 선학 체계에서는 명(命)이라 불렀다. 공자가 말한 지천명(知天命)의 세계이다.
우리가 동물성과 소유욕, 분별심과 탐욕, 파괴적 본능과 질투를 초월하고 참된 인간으로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이 자리까지 의식이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이기심과 분별심, 탐욕에 물든 지구권 인류의 진정한 과제라 볼 수 있다. 이 중심의 신비로운 점은, 수련이나 명상을 통해서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물론 명상과 수련을 통해 이 중심을 각성시킬 수 있는 기초적 에너지원은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세계로 오려면 우선 양심과 진실이 살아 있어야 한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감응, 그리고 이해와 배려, 수용력은 가슴의 중심을 살찌운다. 진실과 사랑이 지극해지면 아름다움으로 변하게 되는데, 아가페의 중심은 순미(純美)한 아름다움의 지각(知覺)과 함께 열리는 것이 특징이다.
그 다음에 판단분별, 계산의 주된 원인인 동물적 이기심이 완전히 포기되고, 의식과 잠재의식이 함께 진리에 대한 열망으로 사무쳐야 한다. 가슴의 중심의 핵심은 ‘무조건적으로 베풀라!’ 이다. 만일 단 하루라도 무조건적으로 베풀 수 있다면, 아가페의 중심은 순간적으로 열린다. 비록 완전히 열리지는 않더라도, 그의 가슴 속에 있는 참사랑의 파동에 감응하고, 붓다권의 의식군(群)들과 만나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된다. 가장 확실하게 이 중심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비전으로 내려온다. 그것은 이 중심이 완전히 열린 스승과의 만남에 의해서 가능하다. 만일 길을 떠난 사람이 이기적 마음 없이 스승에 대한 마음과 신뢰로 충만해 있을 때, 제자의 가슴은 스승의 가슴에서 나오는 무아경(無我境)의 신비로운 참사랑의 에너지에 감응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감동을 통한 열림으로 비의적(秘意的)으로 전달된다.
가슴의 중심이 열렸을 때, ‘펑!’ 하고 마치 우주 전체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들리며, 그의 의식은 빛과 사랑에 얻어맞은 것과 같은 체험을 겪게 된다. 그와 함께 자신의 자의식을 이루던 세계 전체가 떨어져 나간다. 진정한 메타노이아, 성변화(聖變化)가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들은 이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중심은 그 속으로 들어갔을 때 중심이 없으며, 광대하고 무한하다.
중심은 딱딱한 어떤 상념이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참사랑은 무한하며 한계가 없다. 아가페의 중심이 열렸을 때, 의식과 잠재의식 전체가 사랑의 파동을 먹게 되며, 잠재의식이 탈바꿈되는 것은 이 가슴의 중심이 열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만일 구도자가 삿된 에너지, 즉 이기심이나 탁한 음식, 저급한 감정에 물들지 않고 오랫동안 아가페의 진동의 영향을 받게 될 때, 의식체에 지복체(또는 미체)라는 에너지장이 형성된다. 이것을 신지학에서는 붓디체라고 불렀다. 붓디체는 윤회를 이끌던 자의식이 작용을 멎는 순간 “내가 님, 우주 속에 존재한다” 라는 자각과 함께 깨어난다. 구르제프는 이 아가페의 중심을 ‘상위 감성 센터’ 라고 불렀다.


③ 생기의 중심은 골반 및 단전을 하나의 체로 하고 있다. 성선(性腺) 및 부신선(副腎腺) 등과 관련되어 작용한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중심이다. 단전이라고 한다. 용기와 익살, 그리고 육체 치유 에너지의 근원이다. 이 중심은 일상적으로는 힘과 생기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예기치 못했던 위급한 순간이 올 때, 이 중심은 급작스럽게 깨어나 인체를 보호한다. 이때 시간은 슬로비디오로 되거나 완전히 멎는다. 생기의 중심은 단전과 명문, 회음 내의 미세한 생체에너지장으로 이루어진다. 신경계의 긴장이 풀리고 호흡이 깊어지고 고요해졌을 때 우리는 생기의 중심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은 부드럽고 그윽한 기운으로 감지된다. 이것이 결정화를 이룬 상태를 고대 한국의 선학 체계에서는 정(精)이라 불렀다.
육체보다 더 미세한 파동의 생명진동을 나르는 내부 기관들이다. 호의와 저력, 끈기는 이 센터가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만일 이 생기체가 지각되는 상태에서 두려움에 물들지 않고, 자신이 상념으로 설정한 잠재의식의 틀, 즉 한계를 뛰어넘을 때 골수와 근육을 하나로 이어주는 특수한 진동대가 형성된다. 이것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에너지장이다. 이것을 기상체(氣祥體)라고 한다. 태극권이나 기공, 한계넘기 등은 기상체를 깨우는 수련들이다.
옛날 환단조선에서부터 고구려, 신라를 통해 내려오는 선학 수련법에서는 이를 성명쌍수(性命雙修), 또는 성명정 삼수(性命精 參修)라 하여, 이 세계의 신성한 중심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가는 ‘회삼귀일지도(會三歸一之道)’ 라고 했다. 세 개를 하나로 통합시켜 근원에 일치시키는 존재를 신이라 불렀다는 것이《환단고기》의 설이다.
각자 부르는 이름이 다른 까닭은 접근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의식의 원리로 파악하기도 하며, 신비생리학적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할 수도 있고, 에너지장의 입장에서 설명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고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성, 감성, 그리고 육체적 생명력 즉 체성은 이 영적 중심들의 파동이 한 옥타브 내려온 것으로, 일상적 감각과 사고 행동의 루틴을 담당한다.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위 센터가 내는 에너지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들이 인식하는 것은 그 주파수 안에 제한된다. 우리가 경험하고 지각하는 세계는 전체가 아니며, 사실상 이 하위 센터가 지각하는 범주 안의 일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명백한 진리를 외면하며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한 것을 전체라고 생각해버리는 버릇이 있다. 우리는 앎을 잘 써야겠지만 우리가 안 것, 경험한 것만을 전부라고 고집할 때, 스스로 우리가 인식하는 그 마음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착화이다.
지성과 사고를 담당한 육체 내부의 센터는 두뇌와 척수, 신경계이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와 심리의 세계가 여기에 부속된다. 감정 센터는 용(用)하며, 기타 내분비샘의 작용과 긴밀히 연관되어 움직인다.


4. 각성과 자각의 차이, 그 상호관계

초월적 각성과 평상심적 자각을 융화시키는 것이 빠른 수행이다. 초월적 각성은 본체 지향적이고 현상세계와 무관할 수 있는 깨어있음이다. 상부 차크라의 각성, 삼매력, 선정력, 에너지 행법에 의한 각성을 포함한다. 현상이 일어남을 영화의 영사(映寫)로 본다면, 각성은 광원(光源) 지향적 위빠사나의 집중수행에도 이런 각성이 동반될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평상심적 자각은 일상생활에서 자기 구조를 보고 넘어갈 수 있는 깨어 있음이다. 광원에도 필름에도 걸리지 않고, 상황에 깨어 있음이다. 자기의 의식적·무의식적 구조 전반을 보고 부작용의 원인을 파악하여 벗어나고, 긍정적인 작용을 쓸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적이고 일상적이며, 인간적인 관계를 포함한 살아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의 작용을 파악하는 자기 객관화를 이루어, 자아상과 중생심의 미망을 벗어나게 하는 힘이다. 하부 차크라의 자각을 포함하며, 삶 속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힘이다.
초월적 각성에 치우치면 메시아적 소명의식에 매몰되어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현실에 어두워진다. 자각만 있으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월적 각성을 길러 그 각성 에너지를 일상생활에까지 융화시킨다면 자각에 큰 힘이 될 수도 있다. 자각은 깨어있음이 일상성 자체인 것이다. 자각이란 상식, 집단과 개인 무의식에 대한 자각을 포함한다. 상대방의 관심사에 치우침 없이 열려 있되, 상대방에 끌리지도 말아야 자각이다. 자각은 자기의 미세한 욕구, 이기심을 깨닫고 가는 것이다.
사하스라르만 열리는 것은 별볼일 없다. 초월적 각성만 있게 되면 자기의 하부 차크라적 미세 욕구를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용하면서도 자기가 이용함을 자각하지 못한다. 자각은 곧 중도=정견(正見), 치우침이 없는 시각, 인간, 사물,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명철히 보는 것이다. 평상의식인데, 텅 비어 있어 상황 자체만 있는 것이다.


5. 갈등의 원인

우리의 생각이 하나의 중심에서만 나온다면 갈등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싸우고 그 갈등으로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소실한다. 앞생각이 뒷생각을 배척하고, 또 다른 생각은 현재의 생각을 반대한다.
우리는 다양한 체험을 하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지성과 감정이 싸우고 지성과 몸이 싸운다. 또한 하위적 감정과 고차적 양심이 싸운다. 이것은 의식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부과한다. 때문에 우리는 갈등 없는 삶을 바란다. 하지만 갈등이 오래 없으면 또 심심해져서 결국은 새로운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내서 고생한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의식의 본체에서는 모든 중심이 하나의 통일체로 기능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라고 동일시하고 있는 자의식의 주의력이 한 센터가 내는 에너지에 과도하게 고정될 때 의식은 그 방향으로 고착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할 것이다.
이것이 사고의 단편화 과정이다. 사고나 감정이 단편화될 때 의식은 그쪽으로 편성되면서 국집화를 이루고, 의식은 그 다른 생명의 중심과는 단절된 채 그 속에 갇히게 된다. 이것은 각 센터들 사이의 순환 장애를 가져오고 각 센터들은 어떤 통일된 에너지장이 결여된 채 부족한 에너지를 채우려고 하다 보니 체계 자체가 문란해지는 비정상적인 시스템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순환 장애는 육체에도 영향을 미쳐 피의 순환 장애, 그리고 신경증 등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에너지 부족과 고갈을 야기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과도기적 존재다. 즉, 인간은 동물에서 신성(神性)으로 진화해가는 도상에 놓여 있다.


6. 에너지 누수에 대하여

인간은 생물이기 때문에 에너지가 부족할 때에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물량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을 때 마음은 느긋해진다. 하지만 일단 물자가 딸린다고 판단되었을 때 의식은 걱정을 하고 신경계는 과도하게 긴장한다. 에너지 누수의 진정한 원인은 물자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경계가 긴장하기 때문에 호흡이 얕아져서 생기는 것이다. 에너지 누수의 또 다른 원인은 질서가 문란해진 체계끼리의 갈등, 감정의 부조화, 또는 저급한 감정에 대한 부정적 집중이다.


7. 단편화와 고립화

자기가 경험하거나 들은, 또는 읽은 지식에 상념으로 초점을 맞추다 보면 그것만이 실존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생명력이 그쪽으로만 과도하게 흐르다보니 스스로 다른 전체와 고립되는 현상이 생긴다. 단편적 시각과 관점은 결국은 그 관점을 통해 자아를 낳게 되고, 자아는 항상 과거라는 기억의 일부분이므로 분열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분열된 행동은 순환을 방해하고, 사고나 욕망의 그을음을 남긴다. 이것이 흘러가지 못하고 의식, 또는 몸의 한 부분에 남아 있을 때 걸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전체로부터의 소외는 결국 단편적 시각 때문이며, 내부의 우주의 센터 사이에도 고립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머리로만 살아가는 현대인이 가슴의 감각과 사랑마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명확해진다.


8. 현실이란 무엇인가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을 말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사고가 상상하고 우리의 인식이 미치는 범주 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의 지각이 넘어서는 곳에 있는 세계는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모르기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의 현실인식은 우리가 오관으로 지각하고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알았다’ 의 세계, 즉 인식권에 달라붙어 한정되어 있는 세계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감각기관의 능력 안의 현실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 설정한 상념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면서 허덕이고 있다. 광대하게 넓은 실존의 세계를 지각하지 못한 채, 인식권 안에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허덕이며 소중한 생을 소모하는 것이다. 붓다는 이런 세계 안에서 방황하는 것을 윤회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통칭하여 형상의 세계, 즉 색色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의 인지 영역 너머에 있는 현묘하고 영묘한 세계들을 총칭하여 공(空)이라 불렀다. 그런데 사실 이 형상의 세계와 비형상의 미현현계는 서로 의존해있기 때문에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인 것이다.


9. 의식의 확장

우리가 인식권의 세계에 같혀 살아간다면 우리의 생명과 의식은 결국 전체화되어 흐르지 않고, 고립화가 발생할 것은 자명하다. 장자는 광대한 우주에 비해 인간의 앎이란 나무 위에서 울고 있는 자벌레의 수준에 불과하다고 했다. 인식권 너머의 세계는 단지 의식, 즉 오관과 생각에 잡히지 않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식할 수 있는 세계보다 인식할 수 없는 세계들이 무수하게, 광대한 영역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 의식의 풍요는 결국 이 광대한 비인식권에 대한 감지 능력의 증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인식할 수 없는 광대한 세계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인식하는 세계는 비인식권의 효과나 결과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비인식권, 즉 공의 세계를 알아야 생명은 순환구조로 변하고, 인식하는 세계의 바탕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직관지와 지혜, 또는 예지는 바로 초월세계로부터 오는 것이다. 예로부터 인식의 한계를 넘어가려는 시도들은 무수히 존재했다. 의식을 확장하는 실천적 노력을 총칭하여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은 자신의 실존의 바탕이 되는 생명의 근원으로 나아가는 열망 또는 집중이다.
생명과 정신의 위대한 힘을 배우는 과정이 바로 삶이다. 진화와 성장이란 더욱 지극하고 역동적으로 고차적인 생명의 힘에 감동하고 그것을 다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커가는 과정이다. 진화는 더욱 높은 가치로 올라가는 것이며, 성장이란 표현이 더욱 충실해지고 완전해짐을 뜻한다. 지극해지면 가장 깊은 중심 속으로 들어가며, 곧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진화한다.


10. 해피타오의 인류사적 비전

현재 인류의 대다수는 안타깝게도 왜곡된 역사의 상처로 인해 피해의식·자학·자신감 결여로 고통을 받고 있다. 한편 권력이나 힘을 갖게 된 이들은 타인의 의견이나 고유성을 억압·말살하는 독재자적 권위의식·자만·에고 등으로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신성한 생명의 발현을 저해하는 삶을 살고 있다. 결국 이러한 힘의 어긋난 행사는 미세한 정신의 차원에서 갚음을 받게 되는데, 가슴이 황폐해지고 피폐해지는 사막화에 시달리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낮은 파동의 에너지를 돌려받게 되어 이유도 모르는 불안과 불행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념파동들이 전 인류의 생명의 활력적인 솟아오름을 막을뿐더러, 나아가 영혼을 어지럽혀 그 본유의 밝고 영명한 지혜를 나투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의 성스러움을 외면하고 생명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는 불감증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감사함의 감정을 잊어버리면 정신의 힘이 나약해지고 황폐해지는 것이다.
인류와 지구 전체의 집단의식에 전염되어 있는 이러한 불행과 어두움의 상념파동을 치유하여 생명 본래에 내재해 있는 밝고 위대한 힘 ─ 창조력·사랑·평화·협동심 등을 회복하려면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창조의 근원(창조 원리, 본성)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창조의 원천에 대한 감사함의 능력은 곧 삶을 활기차게 만들어 주며, 일상의 만남 속에 발견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현하는 행복의 강으로 우리를 인도해줄 것이다. 이것은 그대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불행의 패턴을 일거에 치유하고, 본유의 생명에서 세차게 솟아오르는 위대한 창조의 지혜와 하나되는 의미 있는 삶의 시작이다.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은 우선 자신의 생명에 대한 사랑에서, 자신에게 내재한 고유성과 독특함을 창조주에게 부여받은 선물로 감사히 여기고 이를 지극히 사랑하는 정신에서 출발한다.
우리 각자에게 내재한 고유한 힘과 독특한 빛깔은 우리 자신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힘이며, 신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에 표현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참나, 즉 고유성과 특성을 신의 사랑의 표현임을 떳떳하게 인정하고, 이를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부분으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키워나갈 때,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생명 속에 깃든 독특하고 고유한 영역과 빛깔을 존중하고, 배려해주고, 나아가 그것을 찬미해줄 수 있는 정신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양심이다. 양심은 정신에 내재한 독특한 힘으로, 나의 의식을 생명 본래의 흐름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해주는 배의 고물(밑뒤)과도 같다. 양심 또한 내가 받은 것만큼 되돌려주는 페어플레이의 정신이며, 권리만큼 의무도 인식하는 정신이다. 양심은 곧 삶의 근본 흐름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다. 그럴 때 우리 속에는 생명의 진실한 기운이 살아나고 관계 속에 따뜻함과 배려하는 푸근한 정이 살아날 수 있다.


11. 행복한 이들이 미래 시대의 주역이다

인류의 발전과 평화로운 문명은 개인의 행복도와 비례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이웃과 잘 사귀고 자기자신을 사랑하며 삶의 비전이 뚜렷하다. 그들은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생명에 대한 경외로움을 찬미하여 누릴 줄 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쉽게 어울리며 타인의 위대한 점에 대해 잘 감동하고 그것을 부추겨 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장점과 행복을 함께 즐거워할 줄 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한다.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한 본성을 살리고 사랑하며, 그것을 이웃을 위해 쓸 줄 아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감에 차 있으며, 자신의 특성이 곧 창조주의 뜻에 따르는 것임을 알아, 만사에 떳떳하고 삶의 어려움에도 잘 순응한다. 그들은 어려움 속에도 뭔가 배울 것을 찾고 그것에 감사할 줄 안다.


12. 밝아오는 정신문명의 시대를 여는 해피타오

지금 지구는 새로운 문명 속으로 진입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류는 제2의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세계를 풍미하던 물질지상주의적 가치관과 과학적 세계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물질의 풍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잠정적 합의는 이제 폐기되고 있다. 그와 더불어, 물질을 정복하여 부를 창출하는 남성적이고, 가부장적이며, 공격적인 신념체계 또한 거대한 환경파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운명이다.
보다 수용적이고, 자연과 대지를 사랑하고·존중하며·화합하는 정신이 자신은 물론, 지구를 보호하며 새로운 지구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진보적인 정신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영적인 각성과 정신의 풍요를 추구하는 열망이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영적인 각성을 이루어 이를 일상생활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이들이 사회적인 존경과 부를 누리는 사회가 될 것이다. 영적인 서비스와 정신의 개발은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개인과 집단에게 창조력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정신문화적 산업이 될 것이다. 직관적 지성이나 창의력, 창조적 감성 개발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이 방면에 통달한 이들은 새로운 지구 문화를 건설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이들은 창의력과 직관적 통찰력, 조화력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는 새로운 문명에 크나큰 원동력이므로 정신적으로 존경을 받음은 물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운 삶을 보장받게 된다.
이런 소식은 이미 선대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예견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비전이 최수운과 김일부 선생의 정역을 통해 예견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플레이아데스인들의 채널링을 통하여 소상히 밝혀지고 있다. 해피타오에는 이러한 지구 문명 변화의 큰 흐름을 타고서 용사의 나라에서 태어났다. 지구 에너지의 모든 정수가 알알이 녹아 있어 세계문화의 중심이 될 간동(艮東), 해뜨는 나라에서 이 비전이 시현되었다는 것은 인류의 영적 역사로 볼 때 참으로 의미가 깊은 일이다.
문헌으로도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 한반도는 위대한 남방의 문화를 꽃피운 무 대륙과 황하문명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그 자리가 지금까지는 혼란과 분열, 상극과 대립이라는 극도의 난관에 빠져 있었다.
이런 환경은 한민족 전체의 비극이었지만, 이를 해피타오에서 가르치는 창조발상법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세계의 혼란을 활달한 기상으로 극복하여, 조화와 풍요의 터로 바꾸어내라는 우주의 메시지인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숭상해온 봉황은 바로 이러한 정신문화의 상징이다. 이를 극복하여 영적 각성으로 승화시킬 때, 참으로 큰 것을 세계에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선물받은 것이다. 해피타오의 코스(메인 세션)에 참가한 이들은 모두 이처럼 위대한 새 문명 창조에 동참하게 될 영광을 만난 것이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법을 터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의 주역이 될 비전을 얻게 될 것이다.
해피타오의 테크닉들은 전적으로 지금 시대에 맞게 새롭게 개발된 독창적인 것이지만, 그 정신 속에는 사랑과 조화, 그리고 풍요를 염원하는 인류의 오랜 꿈이 담겨 있다. 도가의 조화력, 기독교의 사랑과 성령, 불가의 공(空)과 선가의 직관, 그리고 몽골리안과 인디언의 용사적 기상과 자연 치유 철학이 조화롭게 녹아 있다. 그리고 탄트리시즘의 포용력과 풍요의 비전이 시현되어 있다. 해피타오 세션들을 통해 사람들은 창조적 지성의 원리, 기운 각성의 원리, 카르마 정화의 원리, 사랑의 원리, 이심전심의 원리, 풍요의 원리, 행복 창조의 원리, 영적 감성 개발의 원리, 조화로운 인간 관계의 원리와 깨달음의 비전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www.happytao.com[참고]


한바다 해피타오 인터내셔널 대표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서울대 명상요가회와 청담동 명상모임 등을 이끌었다. 수많은 인생고에 직면하여 방황하던 대학시절, 지리산 피아골에서 비를 맞으려 명상하던 중, 삼라만상이 신의 빛으로 물결치는 무아경을 체험하고는 본격적인 구도활동에 나섰다.
궁극적인 진리를 찾고자 신지학과 티벳밀교 등을 공부하던 1986년 봄, 부활절에 반야심경을 외우다가 마음이 크게 열리며 남과 나가 둘이 아닌 참사랑의 빛에 빨려들면서, 급진적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소명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의 곁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즉각적인 깨달음을 전수받게 되었다.
그후 명상모임을 중단하고, 깨달음뿐만 아니라 육체와 심리적 치유를 통합하는 전인적인 완성의 원리를 탐구하고자 은거하면서 한의학과 호미오패디 등을 연구하며, 고조선에서 연유한 치유의 스승들과 교류하였다.
미국에 잠시 이민을 떠났다가, 1992년부터는 세계 각지의 영적지대를 순례하면서 미래 삶의 패러다임인 해피타오의 비전을 받았다. 해피타오 안에는 신성의 복권과, 전인격의 완전한 꽃피움을 통해 지구에 새로운 영적 문명을 태동시키는 소명이 담겨 있다. 지금 그는 전지구적 차원에서 해피타오 비전을 전하고, 신문명을 개화시킬 선인들을 탄생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에《마하무드라의 노래》·《돼지우리에 무지개 비치고》·《삼천년의 약속》·《영감의 서》·《사랑은 사랑이라 부르기 전에도 사랑이었다》를 비롯하여 공저인《행복》 등이 있으며,《히말라야의 성자들》·《쿤달리니 탄트라》·《바보나라 예수》·《70일 간의 우화여행》 등 10여권의 번역 및 편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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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비전 전문 명상가 한바다 file 조용헌의 고수기행  2006-03-28  17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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