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하세요.
얼마 전 신문에서 법명이 ‘현공’인 스님의 기사가 났습니다.
평상시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텐데
‘무문관’이라는 활자가 눈에 띄어 읽어 보았습니다.
저도 한때 무문관을 동경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
스님께서는
천축사(?)인가 하는 사찰에서 무문관 수행을 6년 동안 하신 분이랍니다.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무문관 6년을 마치신 분은
스님을 포함해서 단 두 분밖에 없으시다고 하더군요.
인내심이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기자가 스님과의 인터뷰에서, 그
곳에서의 수행에 대해 질문을 하니 스님께서는
‘그곳에서 보이는 별과 달이나 사문 밖에서 보이는 별과 달이 똑같습니다.’ 라고 대답하시더군요.^^
그 대답을 들은 기자는 나름대로
‘진리는 둘이 아니고 어쩌고 저쩌고….’ 해박한 불교 해설을 붙여 놓았더군요.
아마 대단한 스님이시니까 지레 어떤 높은(?) 경지의 말씀이시지 않나 싶어서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친절하게 알려주려고 하신 거겠죠.
저는 직감적으로
‘진리는 내가 만들어 놓은 수행에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더군요.
수행을 하면 진리를 얻는다는 자기 설정으로 그 힘든 수행조차 만드는 바로 ‘나’에게…..^^
진리는 수행을 하여야 도달하여진다고 진리나 수행이 찾아와서 말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그러한 왜곡된 정보와 그릇된 판단에 의해
힘들고 혹독한 수행을 하여야만 깨우친다는 스스로의 강한 믿음을
오래 전부터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더군요, 물론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었죠…..^^
왜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서 수행을 할까요?
그러나 진리를 찾기 전에
‘나는 왜 진리를 찾고 있는가?’ 하는,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하고,
스스로의 마음자리부터 살펴 보는게 앞서 하여야 할 순서이지 않겠습니까?
–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이러한 귀중한 정보제공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미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가장 큰 자기설정이 벌써 마음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죠. ^^
진리를 찾는 마음은,
아무도 나에게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나는 아직 진리를 구하지 못했다.’라는 스스로의 설정과 구속에 의한,
바로 ‘부족감’이라는 ‘욕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겠죠.
무언가 알려고 하는 찾으려고 하는 답답한 마음도
근본은 부족감을 채우려는 내 마음의 작용이지 않겠습니까?
진리를 찾는 여정은 조금 조금씩 몰랐던 부분이 알아져 가고,
작은 깨달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재미도 있고 열성을 드렸다가,
시간이 지나 들뜬 마음이 어느 정도 가시면 ‘이게 아닌데….’ 하는
허무감이 밀려와 허탈해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갈증 난 자가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이
채우려는 욕구만 점점 더 커져갈 뿐이죠.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칠 때쯤 해서….
어느 순간 진리라는 녀석은 여전히 산 넘어 안개에 가려있고 답답함은 여전한데
진리를 찾아 한때 기쁘다가 어느새 회의감에 풀죽어 하는 나를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의 위세(?)는 여전한데
정신없이 헤메고 있는 내마음, 내모습에 서서히 관심이 가져집니다.
“이거 내가 무얼하고 있지? 왜 이러고 있지?” 하며 초기에 가졌어야 할 질문을
스스로에게 이제 던지기 시작합니다. ^^
그제서야 외부로만 향해,
앞 뒤 구분 못하고 뛰어다니던 시선이 “내면”을 향해 천천히 방향을 바꾸어 봅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하여
한참 동안 “외부”와 “내면”에 널뛰기하던 마음이, 어느 임계치를 넘어가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겨울밤에 눈이 쌓이듯이 자연스레 본성을 회복합니다.
원래 성품이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모든 공부에 앞서 반드시 “나”를 찾는 공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닌 욕망이 하는 공부는
언젠가 마지막으로 반드시 ‘나’라는 관문을 꼭 거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진리의 문을 열 수 없을 테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개성과 모습이 다르듯이 깨달아가는 과정은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다 자기가 설정한 독특한 자기만의 방법이 있겠지요.
언젠가 제 글에서
‘깨달음은 없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그렇습니다.
깨달음의 관점에서의 깨달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무명, 무지, 어리석음이 있기에 깨달음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면
그러한 어리석음은 누가 저에게 가져다 주었나요?
아닙니다. 스스로가 설정하고 한계 지워놓은 것 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찾아 외부로 치달을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형화된 내마음을 보면서 내마음에 얽메어진 허상을 알아 채시게 되면,
지극히 자연스레 구속이란 환상이 사라지며
그토록 찾고자 하던 깨달음까지도 한꺼번에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마저도 내마음의 환영이니까요. 장애는 실체가 아닌 내마음의 환상이기에………
이제는 깨달음이라는
스스로 설정했던 명제가 이제는 나에게 아무런 스트레스나 감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내가 만들어 놓은 개념에 내가 치이지 않는 것이죠. ^^
이렇듯
본성인 내가 원래 대자유였던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자유가 ‘내’가 되는 것입니다.
불가에서 무슨 꽃을 찾아 온 천지를 헤메고 다녔으나
꽃을 찾지 못하여 힘들고 지쳐 고향집에 돌아와보니,
우물가에 그토록 찾던 꽃이 소담스레 피어 있었다는…. 등에 업은 애기 3년 찾는다는…
그이야기가 꼭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주먹을 쥐어본 자만이 주먹을 펼줄알듯이 찾아보지도 않으면 알수가 없겠지요.
이것은 내가 찾아야 할 대상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대상을 존재하게 하고 찾는 주체로써 그 무엇이니까요,
- 이렇게 난해하게 쓰고 싶지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현재는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군요.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다시 현공스님 이야기로 돌아가서
기자의 어떤 질문에 스님께서는
‘지금이라면 무문관에 들어가라해도 다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실히 선을 긋더군요.
공감이 많이 가던데요.^ ^
사람들이
산꼭대기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거라고 산을 오르나
산정상의 허공과 산밑의 허공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틀린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 마음에 있겠지요.
자꾸자꾸 특별한, 더 좋은, 고귀한, 성스러운
이러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개념. 단어밖에 더 있겠습니까 ?.
그것도 단지 지적 소유의 욕망으로…..
그곳 6년 세월이 스님의 마음에 오죽 답답함으로 남으셨는지,
스님께서는 무문관 생활 6년을 마치시고
지금은 29년째 한국, 일본등 하루종일 걸어만 다니신다고 하시네요.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걷는게 마음 다스리기 제일 좋다”고 하시더라구요.
한국에서 걷기에 제일 좋은 곳은 경상도 “상주”라고 하시던데 언제 기회가 있을 줄 모르겠군요.^ ^
감사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행복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