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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들이

조회 수 10075 추천 수 0 2010.02.04 12:36:39
Black_hole_by_Spardauk.jpg
우리의 일상적 삶을 살펴보면, 마음은 끊임없이 탁류(濁流)의 흐름에 물든다. 때문에 마음의 본래 순수성·청정함이 유지되지 않는다. 마음을 살펴보면 맨 먼저 그것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마음이 탁류에 빠져있음을, 분별과·혼란·미혹 속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명상의 가장 현실적인 시작은, 그러한 것이 내 속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면 절실함이 사무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 부정한 탁류를 여의려는 결심과 노력을 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변화이다. 무위(無爲)의 결심이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이전 단계는 “중심잡기”). 화두(話頭)는 이 단계에서 자동적으로 나온다. 이제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깨달음이다. 당신이 모든 이원성 너머 나눔이 없고·분열이 없으며·꾸밈이 없이 싱싱하게 살아있는 본래의 마음과 만나는 것, 그 자발적인 앎으로 넘쳐흐르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빛들이란 무엇인가? 빛들이란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심오한 단계로써, 개인이 발견할 수도 자각할 수도 없는 아주 심층의 고(苦)와 문제점을 발견하여, 그로부터 놓여나는 과정이다. 밑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이런 심층의 응어리는 아주 어린 시절이나 전생 등의 극심한 상처나 충격의 경험을 통해 무의식에 잠복하였다가, 당신의 판단이나·감정·행동을 기계적으로 강제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밑프로그램에서 놓여나는 것은 깨달음보다 더 큰 자유와 해방감을 선사해준다. 진정한 행복의 시작은 밑프로그램에서 해방되고 나서야 가능할 것이다. 해피타오의 “메인 세션” 과정에서는 이것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그것은 행복과 기쁨의 능력, 창조력의 능력 되찾기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빛들이를 통해서 밑프로그램에서 해방되는 것이야말로 해피타오에서 그대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행운이다.
불안이 일어날 때, 그 한가운데로 들어가라. 그 속은 오히려 고요하다. 불안은 저절로 흘러 빛이 되리라.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은, 두려움이 강박관념이 되어 어떤 상(像)이나 개념으로 도망가지 않고, 고통이 일어날 때, 고통과 더불어 함께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고통의 중심에서부터 커다란 자비가 나타나게 된다. 그 자비에서 창조력이 솟아오른다. 지겨움이 일어날 때, 도피하지 말고 지겨움의 핵심 속으로 들어가라. 두려움이 일어날 때, 도피하지 말고 두려움과 함께 있으라. 두려움이 온다·머문다·간다의 전과정과 함께 있으라.

노여움이 있을 때, 노여움에서 도망가지 말고 노여움 속에 존재하라. 노여움의 전 과정을 이해하라. 그 속에 노여움이 없는 순수공간을 발견하라. 노여움이라는 말에 반응하지 말고, 노여움 밑의 에너지에 접촉하라. 아픔이란 고통도 실은 하나의 에너지인데, 우리는 아픔을 피하거나·참거나·또는 받아들이면서 아픔을 있는 그대로 체험하지 못하고 아픔을 왜곡시킨다. 이러한 왜곡이 오해와 환상을 낳으며, 우리 존재를 분열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아픔이 있을 때, 머리는 “아픔” 이라고 이름 지음으로써 아픔 자체의 직접적 경험과 연결되지 않고 개념으로 도망가고, 그 개념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경험과·지식·이미지와·기억들을 연관시켜 아픔을 은폐시킨다. 즉 우리는 개념과, 그것과 연결된 이미지에 반응함으로써 아픔의 현존을 놓치는 것이다. 실재의 아픔을 놓치고, 환상 - 우리가 머리 속으로 만드는 개념과 의미화로 도피하여 그것에 반응하면서, 대신 직접적 반응의 생생한 경험과 그것에 대한 바른 통찰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개념과 자아의 전모(全貌)다.
우리는 아픔이라는 현존의 에너지와 접촉을 잃어버리고, 과거에 반응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실재보다 더 부풀려 환상의 공포를 체험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공포는 작디 작은 상념 알갱이에 불과하다. 자신을 알 때 생명을 온전한 흐름 속에 꽃피우며, 우주가 부여한 진리를 나를 통해 구현할 수 있다. 자신을 아는 길은, 바깥을 비추며 자신을 잃어버리는 허망한 앎의 세계에서 마음을 거두어 들이어, 가장 깊은 내면에 빛을 비추는데 있는 것이다.

안으로 잠시 들어가는 것은, 자기만의 섬으로 숨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자비와 사랑이 되어 열고 나오기 위함이다. 자신을 지켜보지 않았기에, 자신을 모르고 그림자를 쫓아, 미움·애착·분노·공격성·두려움·질투로 온전했던 생명에 혼란된 기운을 일으켜 기를 누설시키고, 급기야는 얼음덩이가 된 그림자들이 마음과 몸의 병을 만든다. 대체로 병(病)이란, 혼란과·갈등·무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뜻한 사랑·열린 마음은 이런 환경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빛을 안으로 거두어 들이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현묘하고 현묘한 도(道)의 흐름과 유합할 때, 모든 그림자와 혼란은 절로 사라지고 생명력은 전일해진다. 누설되던 기(氣)는 저절로 내부로 모이게 되며, 삿된 에너지는 소멸된다. 이것이 정신을 조화·통일하여 태극(太極)에 이르고, 무극(無極)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우리는 어두운 마음의 상태, 즉 근심·갈등·분노·질투·무지·두려움의 상태에 빠지면서 중심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되는데, 까닭은 이런 칠정(七情)이 기를 누설시키기 때문이다. 부조화를 조화로 바꾸려면, 그림자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그 원인을 자기 쪽에 찾아볼 일이다. 그러면 매듭지어진 생각은 저절로 풀어지며, 그로 인한 기의 유실은 멎게 된다. 통찰력(洞察力)에 대한 공부는, 이런 요소들을 지켜보고 궁극적으로 이를 지혜와 자비로 변형시키는 데 있다.

사랑이 피어나고, 어둠을 밝혀 줄 힘을 기르고, 생명의 에센스(Essence)라 할 수 있는 내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길이 “바로 봄” 이다. 바로 봄은 완전한 행동의 길이다. 바로 보되 관념에 머물지 마라. 행동하라. 저 넓은 우주를 마음대로 유영하라. 자각이란 온몸으로 행함이다. 테크닉이라기보다는 열려 있음이요, 전체로 흐름이다. 숨이 코를 통해 나오는 것을 느껴 본다.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호흡의 흐름에 유의한다. 마음과 몸이 이완된 상태에서 에너지는 창조된다.

여기서 호흡을 바라보는 주체는 당신의 투명한 의식이다. 이완 상태의 의식이 각성되어 있다면, 당신의 주의력은 더욱 명민해지고 감각은 깨어난다. 점차 이 관찰이 깊어감에 따라 숨의 들어감과 나감 사이에 호흡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는 아주 미세한 틈을 발견하게 된다. 이 극히 짧은 찰나는 우리가 육체·시간·공간의 벽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이다. 이 상태에서 싫다·좋다는 관념을 개입시키지 말고, 다만 관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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