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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와 견성

조회 수 17920 추천 수 0 2009.09.23 14: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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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현자들은 인간사의 번민을 초월한 경지를 직접 추구하였고, 살아 있는 동안에 그런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증거하였다. 그런 상태는 무아경(無我境)·삼매(三昧) 등으로 불리웠으며,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의 현역발음이다. 사마디란 “함께 묶는다” 라는 뜻이 있다.

인도에서는 주로 명상을 통해 무아경에 도달한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삼매란 “명상의 대상과 하나됨” 이라고 정의한다. 삼매에도 각종 유파와 단체들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각자 정의가 다르겠지만, 공통분모로 삼매란 “삼라만상의 근본인 진리(眞理)와 하나되는 축복스러운 상태” 라 볼 수 있다.

생존본능과 권력의 추구에 물든 우리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은 그 자체로 고뇌와 끄달림의 주원인이다. 그 자아(自我)가 생산해내는 감정과 상념에 묶여 있는 일상의식은 그 너머의 세계를 지각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기껏해야 상상으로 그 너머의 세계를 그려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삼매가 아니다. 삼매는 직접적으로 상념과 감정 너머의 본성적 실재(實在)를 경험하는 일이다. 오욕칠정(五慾七情)에 묶여 있는 현재의식의 마음에 있어 이것은 희망과 구원의 빛살과도 같다.

그 체험 이후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실재가 아니며, 단지 마음의 그림자이며, 한 가닥 먼지임을 깨닫게 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진짜라고 어김없이 믿고 있지만 그것은 한갓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원적(二元的)인 사고 작용이 멎고, 실재와 합일(合一)이 되는 삼매를 체험해야만 비로소 사고와 기억 너머의 세계로 진입하여 참 실재를 현실로 살 수가 있다. 인간의 마음에 무수하게 붙어 있는 카르마(karma)와 업장(業障)들도 삼매의 체험 이후라야 탈락되기 시작한다.
삼매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인도에서는 명상이 깊어지면 호흡이 끊어지면서 감각도 함께 탈락하고 혀가 위로 말려드는 무아경의 상태를 삼매라고 인정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외계를 전혀 지각하지 못한다. 자각(自覺)이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굉장한 에너지가 깨어나지만 자각이 없는 것이 흠이다. 이런 상태는 숙련된 스승의 인도하에 의식과 몸이 고도로 이완되어야만 진입할 수 있다. 이런 지복(至福)의 체험을 니르비깔파 사마디(nirvikalpa samādhi)라고 하는데 깨달음은 아니다.

또 하나는 일시적으로 사념에서 초월되어 초의식적인 각성을 이루는 상태가 있다. 이런 경우는 특히 제 3의 눈이나 정수리의 사하스라르(sahasrara)가 각성되어 초월적인 광휘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각성의 상태에서는 일상을 떠난 초월적인 지식에 눈을 뜨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 있으면서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본다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수정처럼 투명하게 들여다본다거나 하는 능력이 깨어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예수와 붓다와 같은 성자로 동일시하기도 한다.

처음 이런 상태에 진입하는 경우는 경험은 눈부시지만, 객관세계를 지각하는 객관적 자각이 결여되기 때문에 자칫하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평생을 보낼 수도 있다. 일종의 폐쇄회로(閉鎖回路)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빛이 너무 강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눈이 멀고 만다. 정신 공부를 하다 이런 주관적 폐쇄회로에 갇혀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단지 시작에 불과한 초의식적 각성이 하도 신기하니까, 마지막이라고 판단하고는 자기만이 최고의 상태에 도달했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고 단언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힌두교에서 스승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선가(仙家)에서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야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런 체험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게 단지 초입삼매(初入三昧)임을 자각해야 한다. 인생에는 거쳐야 할 관문과 탐험해보아야 할 여정들이 너무나 많다. 초의식적 각성은 물론 필요하지만 그곳에 한없이 머물러 있는 것은 시간낭비이며, 만일 그 곳에서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을 발달시키면 더욱 해로울 뿐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이런 삼매에 빠져 바깥세상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려서 깨워낸다.

이런 초의식적 각성 상태와, 바깥세상을 온전히 지각하면서 선명한 깨어있음을 유지하는 자각과는 분명히 다르다. 자각은 상대성을 잘 포용한다. 자각의 상태는 고집스럽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분별도 하지만 마음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에만 몰두하여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지 잊어먹는 일도 없다. 자각의 상태에서는 선명히 우주와 자신을 동시에 지각한다. 초의식이 불이라고 하면 자각은 물과 같다. 자각의 상태에서는 자신의 감정과 사고가 일으키는 메커니즘을 선명히 인식하고서 그것을 초월한다.
곧장 삼매로 뛰어드는 초의식적 각성은 분명 필요하다. 사고와 인식의 지평선을 넓혀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사고와 감정의 근본인자인 자아가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고와 감정의 근원인 자아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사고와 감정을 주시해야 한다. 이것이 극치에 이르면 의식 전체가 자아의 움직임을 따르지 않게 되고, 어느 날 자아가 힘을 잃고 탈락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자아의 움직임을 정확히 인식하면서 떨어져나갈 때라야 “자발적으로 자비와 지혜가 구족(具足)되는 상태” 를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견성(見性)이다. 견성이 일어나는 순간 머리에 묶여있던 의식이 홀연 가슴으로 툭 떨어져 가슴 속에 있는 광원의 중심체로 빨려 들고, 그 곳에서 다시 무한한 자비의 터져 나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상태는 경험하는 중심이 자아가 없는 경험이라 생각이나·논리·인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상태를 경험한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알게 된다. “반야(般若, prajna)의 지혜” 는 견성 이후라야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단지 초의식적 삼매나 무아경의 체험으로는 반야를 얻을 수 없다. 반야는 자아의 무지를 타파하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지혜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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