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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오온이라는 해체(解體)적인 선언

수정 삭제 조회 수 1998 추천 수 0 2015.03.08 10:26:07
해공 *.96.226.240

  오온(五蘊, five khanda)은 인간존재를 이루는 다섯 꾸러미, 다섯 다발, 다섯 무더기를 말한다. 브라흐만교의 인간존재 분석은 거칠었다. 명색(名色, 나마루빠)의 분석으로 물질-마음으로 나눈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석존[석가 세존]에 이르러 인간 마음의 분석은 그 정점에 이른다. 인간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다발, 즉 색(色, 루빠), 수(受, 웨다나), 상(想, 산냐), 행(行, 상카라), 식(識, 윈냐나)을 처음으로 해명한 것이다.

  루빠(色)는 물질을 말한다. 인간존재에서는 몸이라고 보면 되겠다. 물질은 딱딱함/부드러움, 따뜻함/차가움, 움직임의 직접적 접촉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고, 흐름/모임/스며듬으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웨다나(受)는 감성적으로 즉각 느껴지는 내용, 즉 즐거움/괴로움/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산냐(想)는 지적(知的)인 즉각적인 앎으로 개념을 끼워서 사물을 보는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중생은 손바닥을 볼 때 보통 산냐로 본다. 즉 손바닥 뒷면까지 포함하는 관념을 거의 자동적으로 만들어 내어 그 손바닥의 관념 안에서 손바닥을 본다. 중생은 관념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관념을 통해보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인식 작용으로서 찰나 생멸하는 산냐 자체는 아니다. 산냐는 관념적인 앎을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찰나적인 바탕이다.

  상카라(行, 상카라)는 탐진치를 비롯한 마음 작용의 내용물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감정은 이 상카라에 포함된다. 마음에 따른 작용 중에서 웨다나와 산냐를 뺀 나머지는 다 상카라라 보면 된다.

  윈냐나(識)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윈냐나는 대상을 아는 작용이다.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윈냐나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석존께서 2500년 전에 대상을 아는 작용 자체를 따로 떼어내서 보신 것이다. 윈냐나는 맨앎이다. 지성, 감성, 그리고 그밖의 앎으로 분류되기 이전의, 그저 대상을 알뿐인 작용이다. 즉 맨 앎인 윈냐나는, 지성을 통한 즉각적인 앎인 산냐와 감성을 통한 즉각적인 앎인 웨다나, 그 밖의 마음 작용인 상카라와 구별된다. 맨앎이 물질에 대해 일어나면 물질의 감각이 일어나고, 맨앎이 지적(知的)인 통로를 통해 즉각적으로 일어나면 샨냐가 일어난 것이고, 맨앎이 감성적인 통로를 통해 즉각적으로 일어나면 웨다나가 일어난 것이며, 맨앎이 그밖의 경우에 일어나면 상카라가 일어난 것이다. 더구나 물질에 대해서도 눈과 형상이 만나면 보고 아는 안식(眼識)이 일어나고, 귀와 소리가 만나면 듣고 아는 이식(耳識)이 일어난다. 냄새, 맛, 촉감에 대해서도 따로따로 맨앎이 일어나는 것이다. 맨앎(식, 識, 윈냐나)은 중생이 흔히 생각하는 마음이나 영혼처럼 고정된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하나의 마음 내지 앎이 눈에서 안식(眼識)이 되고, 귀에서 이식(耳識)이 되고, 냄새, 맛, 촉감을 아는 마음이 되고, 감성을 통해 아는 마음이 되고, 지성을 통해 아는 마음이 되며, 그밖의 통로를 통해 아는 마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눈과 모습이 만나는 순간에 보고 아는 안식이 일어나고, 귀와 소리가 만나는 순간 듣고 아는 이식(耳識)이 일어나지만, 안식과 이식은 하나의 존재자에 의한 작용이 아니다. 순간순간의 조건으로 따로따로 일어나며 순간순간 따로따로 사라지는 작용에 불과하다. 또한 안식이 있을 때는 이식이 없고, 이식이 있을 때는 안식이 없다. 한 번에 육식 중 하나만 있다. 육식 중 2가지 이상이 동시에 존재하진 못한다. 상대방을 보면서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고 보통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념적 파악이 일으키는 착각이다. 안식과 이식이 너무나 빨리 교하기 때문에 보면서 듣는다는 착각이 일어날 뿐이다.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씹는 촉감을 느낄 때는 맛보지 못하며, 맛볼 때는 씹는 촉감을 느끼지 못한다. 씹는 촉감이 생멸하고 난 다음에 맛이 생멸한다. 맛이 생멸한 다음에 씹는 촉감이 생멸한다. 이 교대[생멸의 상속(相續)]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관념으로 접근하면 씹으면서 맛본다는 착각이 일어난다. 관념을 통한 앎은 육식(六識)의 작용에 비하면 엄청 느리다.

  맨앎[윈냐나] 따로, 보고 아는 것 따로, 듣고 아는 것 따로, 냄새 따로, 맛 따로, 촉감 따로, 지성으로 바로 아는 것[산냐] 따로, 감성으로 아는 것[웨다나] 따로, 그밖의 마음작용[상카라] 따로, ... 이 모든 것이 따로따로 찰나찰나 생멸한다는 놀라운 말을 2500년 전에 하고 있는 것이다 - 육식과 달리 수상행[受想行=웨다나, 산냐, 상카라]은 윈냐나[識]와 함께 모든 찰나에 동시 생멸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윈냐나가 실체가 되어 수상행을 행하는 것은 아니므로 따로 따로 생멸한다. 인간존재는 조건에 따라 순간순간 따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런 것들이 느슨하게 모여 있는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의미를 파악했을 때, 인간존재는 충격과 전율, 경이를 느꼈을 것이다. 맞고 틀리고야 스스로의 알아차림으로 확인해야 하겠지만, 범아일여와 영혼의 불멸성이 상식화된 이 시대에 도대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선언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 전율과 공포의 정도는, 오온의 무아, 고, 무아의 특성을 처음 듣고,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도망친, 바라문[브라만교의 사제]의 일화에서 짐작해볼 수 있다.

 

‘내가 없어질 것이다. 나의 것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숙고하면서 생겨나는 연약한 위빳사나는 자아에 대한 갈애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이 배우지 못한 범부들에게 걱정이 생겨난다. 맞다. 그 범부들은 ‘내가 지금 끊어져 버릴 것이다. 이제 어떤 것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마치 자기 자신이 계곡에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어떤 바라문의 예와 같다. 구리정사 아래에서 삼장법사이신 쭐라나가Cūlanāga 존자가 무상·고·무아라는 삼특상을 밝힌 법을 암송하고 있었다. 그때 한 곳에 서서 법을 듣고 있던 어떤 바라문에게 물질과 정신이라는 형성들이 공한 것, 즉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바라문은 마치 협곡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열린 문으로 도망쳐 자기 집에 들어와서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재우면서 ‘아들아, 석가족 붓다의 견해를 생각해서, 또는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하마터면 없어질 뻔 했구나’라고 말했다.

     상윳따 니까야 2권 254경 주석서   

     <<위빳사나 백문백답>>(이솔, 2014): 144에서 간접 인용함

 

<<What the Buddha Taught.pdf>> 

가장 어려운 것은 윈냐나다. 초기불교 경전에 근거하여 움직이는 왈폴라 라훌라의 <<석존의 가르침>>(What the Buddah Taught)에 따르면 윈냐나는 대상의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awareness of the prence of an object)이다. 빨간 색을 볼 때 색깔의 있음을 아는 것은 윈냐나이고 빨갛다는 것을 아는 것은 산냐이다. 이 책은 인터넷에서 pdf파일[What the Buddha Taught.pdf]로 쉽게 구할 수 있고, 전재성 박사의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5)은 이 책을 인용 경전을 잘 찾아 주석을 달아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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